[윤홍]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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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홀연
- 소재는 17음카에서 한 팡이가 올린 소재를 물어왔습니다
오늘따라 네가 참 아름답다.
결혼전주곡, 그 익숙한 반주가 은은히 깔리는, 순백색의 이 넓은 공간과 대조되게, 새까만 정장을 갖춰 입은 모습이, 내겐 아직 어색하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환한 미소를 짓는 네가,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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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서로를 마주본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걸고 영원한 약속을 맺는다.
서로가 서로의 눈에 담긴다.
환하게 웃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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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웃음을 보는 나는 행복하다.
다만 그 상대가 내가 아니라서 조금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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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는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작을, 이제는 나 홀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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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그래, 아마 1학년 때였을 거야, 내가 너를 처음 본 것이.
우린 다른 반이였지만, 우리 반에 자주 찾아오는 너 덕분에, 난 널 자주 볼 수 있었어.
내가 널 볼 때마다 넌, 항상 얼굴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많은 친구들 역시 항상 네 주변을 함께했지. 난, 그때, 아마, 예쁘게 접히는, 고양이 같은 눈꼬리를 보고, 네게 반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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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널 그저 내 맘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1학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됐을 때, 난 너와 같은 교실에서 1년간 함께 할 수 있단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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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께, 2학년 3반 교실에서, 1주일, 1달, 3달, 시간이 지날수록, 이제 너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입꼬리는 자꾸 위를 향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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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용기를 냈어.
평범하던 9월의 어느 날, 5교시 쉬는 시간에, 한창 소심했던 나는 내 공책 구석 한 켠을 찢어, 삐뚤빼뚤한 글씨로, 지수야, 좋아해- 라고 썼던가, 그리고 아마 너의 필통 안에 떨어트렸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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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를 보고 마냥 설레어하며, 어떤 여자애일까, 궁금해 하는 널 보며, 그냥, 평생 궁금해 하길 바라긴 했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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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날, 야자가 끝나 집을 가기 위해 집어든 가방 안에는, 내가 오후에 너에게 줬던 쪽지가 들어있었어. 반대편엔, 또 다른 메모가 적혀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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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랑 사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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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평범했던, 아니 평범할 것 같았던, 9월의 그날은, 너와 내가 함께 시작을 그려나간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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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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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이어폰을 낀 채 낮게 노래를 허밍하듯 따라 부르던 윤정한을 멈춰 세운 건, 아마 지금쯤 그의 뒷모습을 보고 누구보다 발랄하게 뛰어오고 있을 홍지수의 목소리였다.
자연스레 그의 왼쪽 팔에 팔짱을 끼고, 그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정한을 쳐다보는 지수의 눈빛은,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 죽을 것만 같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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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감정표현에 누구보다 솔직한 지수와는 다르게, 이렇게 공개적으로 연애를 드러내는 것엔 아직 거리낌이 느껴지는 정한은, 자신을 쳐다보며 헤헤- 웃는 지수의 이마를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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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공개적인 데선 뽀뽀하지 말랬잖아- 뽀로통하게 토라진 모습까지 사랑스러운 듯, 지수는 다시 한 번 정한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드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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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는 사이에, 이게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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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정한은 부끄러운 듯, 자신의 팔에서 지수의 팔을 빼더니, 앞으로 저만치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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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윤정한! 미안해! 같이 가! 눈꼬리는 축 처져 울상이 된 지수는, 그런 정한의 뒤를 뒤쫓아 캠퍼스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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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한과 지수가 사귄지 딱 1000일이 되는 날, 그날은 지수가 군대에 가는 날이기도 했다.
몇 주 전부터 함께 동거하기로 한 두 사람은, 지금, 새하얀 반달이 뜬 이 시간에, 한 지붕 아래, 한 이불을 덮고 나란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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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아, 오늘이 우리가 함께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몰라.
장난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지수는 정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 어쩌라고.
약간 날카로운 정한의 대답에도, 지수는 정한이 섭섭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서운해 하지 마.
정한의 귓가에 깔리는 낮지만 다정한 지수의 목소리에, 정한은 고개를 틀어 그를 쳐다보았다.
눈가가 빨갛다.
지수는 가만히 정한에게 입맞춰주었다.
가만히 눈을 감은 정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둘은, 따뜻한 밤을, 잊지 못할 밤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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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비로소 유리병 밖으로 빠져나와야 알 수 있다.
투명한 병 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마치 현실 같지만, 그 모습은 왜곡된 것이었단 걸, 그 밖에 서서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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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우리의 생각만큼 관대하지 않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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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작은 뜨거웠고, 아름다웠고, 섬세했다.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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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세상을 나누기엔, 우리가 받는 손가락이, 그 여파가, 우리, 너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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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기로, 함께 시간을 만들어가자고 약속했었지만, 현실은 둘 사이를 자꾸 가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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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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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시간은 흐른다.
너와 내가 다른 공간에 있는 지금도,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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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참 많이 보고 싶었다.
좋아했던 만큼, 너의 손을 꽉 잡아주고 싶었다.
눈물도 많이 흘렸다. 너의 이름을 수없이 불러 보았다.
그럴수록 네 생각은 배가 되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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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계속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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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지구가 태양을 네 번 돌았다.
너는, 나는 그대론데, 너는 변했다.
너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친구가 조심스레 전해준 소식에, 그저 너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딱히 미련이 있던 것은 아니다. 별 다른 기대도 없었다.
그냥, 다시 한 번, 내 두 눈동자에, 너를 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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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대기실 문을 조심히 열었다. 끼익-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토끼눈을 한 네가 내 눈에 담긴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과거의 내가 과거의 너를,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현재의 너가, 현재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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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나는 왜 너에게 좀 더 살갑게 말하지 못했을까. 널 좋아한단 내 마음을, 딱 너의 반만큼만 표현해도 좋았을 걸, 왜 난 우리의 끝에서 했던 후회를 다시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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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가 흔들린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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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축하해.
너를 마주하면 나오지 않을 줄 알았던 말이, 막상 너를 바라보고 있으니, 입술 사이로 쉬이 나왔다.
고마워, 네가 와줄 줄은 몰랐네.
웃는다, 활짝. 그 웃음은, 나에게 너란 존재의 시작을 알렸던 웃음.
지수 네 결혼식인데 내가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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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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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바라본다.
그의 옆자리에 앉는 것을 택한다.
언젠간, 꼭, 하고 싶었던 말.
어색한 침묵 속에서, 입술을 떼었다.
우리가 사귈 때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헤어진 후에야 깨달았어. 그 시간들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이야. 아마 다신 오지 않을 행복한 시간일거야. 지금 와서 이런 말 하는 거.....내가 생각해도 궁상맞고 초라한 짓인데, 나도 아는데,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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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눈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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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수, 너는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행복을 줬던 사람이고, 앞으로 그만큼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이제 나는 더 이상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겠지만, 지금 네 옆의 그 사람과 함께 할 너의 시간이 행복해지도록 기도할게. 고마웠어. 정말, 많이 좋아했다 지수야. 꼭 행복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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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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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약속 있는데 가다가 잠깐 들린 거라 식은 못 보겠다. 얼굴 봐서 좋았어. 결혼...진심으로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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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보였다. 그가 보게 되는 나의 마지막 모습이길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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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 문을 나섰다. 꾹 참았던 가슴의 응어리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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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 참 멋있다, 란 말을, 못 해주었다.
무엇보다 예뻤던 건, 너의 웃음이었다.
너와 나, 의 시작이 되어 주었던 그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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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했던, 그 아름다웠던 시작을, 앞으로는 나 홀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 어쩌다 보니 찌통...
음카에서 한 팡이가 '윤홍 사겼다가 헤어진 후 홍이 결혼 한 썰' 올려준 소재랑 대사 그대로 물어왔어요..
나름 제가 원하던 대로 분위기가 나온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픽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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