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찬] 草花

홀연:) 2017. 3. 11. 20:58

 

[원찬] 草花

 

 

草花(초화) : 풀에 핀 꽃, 또는 아름다운 꽃이 피는 종류의 풀

 

 

노란 프리지아(Freesia) : 천진난만, 시작.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W. 홀연

 

 

 

눈앞에 있는 것들 촉각 시각 청각 미각

세상에 시드는 꽃은 많지만 여기 있는 것들은 시들지가 않아

우린 사랑을 절대 쉬지 않아

- 세븐틴, BEAUTIFUL

 

 

 

 

높은 하늘이 유달리 맑고 파랬던 3월의 그 어느 날, 푸른 하늘에 그려진 새하얀 구름이 선명하던, 아직까진 겨울 냄새를 품고 있는 바람이 가벼이 산들거리던 날.

 

수많은 청춘들은 저마다의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설렘의 무게가 담긴 가방을 꼭 붙들어 멘다. 조금 낯선 길과 낯선 바람, 그리고 그들 마음에 새겨지는 새로운 마음가짐. 새로 맞춘 교복을 어색히 만지작거리는 손이 앳되다. 각자의 발걸음의 무게가 꾹꾹, 길 위에 수많은 발자국들을 남긴다. 길 위로 어지러이 나 있는 모양새가 꼭 그들의 들뜬 마음을 그려낸 것과도 같다. 그들 각자의 표정엔 감출 수 없는 설렘이 서려있다.

 

 

 

 

 

그리고 그 청춘들 사이, 무수히 많은 꿈들과 설렘이 스쳐가는 그 순간에, 같은 교복을 입은 두 소년이 마주 보고 서 있다.

 

 

“....

 

 

좀 더 키가 큰 소년은 자신보다 두어 뼘 정도 아래에 있는 소년에게 꽃다발을 건넨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포장지에 가지런히 싸여있는 한 다발의 꽃, 작은 소년은 고개를 들어 큰 소년을 올려다본다.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작은 소년의 귓가에만 울리던 나긋한 목소리, 느릿하던 그의 말투, 작은 소년을 바라보던 큰 소년의 느릿한 시선과 마주친다. 서로가 서로를 곧은 눈길로 바라본다. 큰 소년은 작은 소년의 깊고 반짝이는 눈 속에서 자신을 오롯이 발견해 기분이 좋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인다. 궁금한 게 많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는 작은 소년.

 

 

“....이 꽃 꽃말이래, 노란 프리지아 꽃.”

 

 

큰 소년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활짝 피어난다. 느긋한 색채의 웃음이랄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작은 소년을 향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큰 소년은 작은 소년을 자신의 눈동자 안에 깊이 새긴다. 마치 그의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작은 소년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여전히 제 앞에 있는 꽃다발,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큰 소년의 한결같은 미소. 그 소리 없는 담뿍한 웃음에, 작은 소년도 푸시시- 웃음을 터뜨린다.

 

 

그게 뭐에요, - “

 

 

작은 소년은 붉게 물든 얼굴을 꽃다발에 폭 파묻는다. 붉어진 얼굴을 보여주기 부끄러웠던 걸까, 코끝에 스미는 꽃향기가 좋아, 작은 소년은 꽃다발에 얼굴을 비벼본다.

 

 

흐응- ”

 

 

꽃송이들이 태워주는 간질거림은 이내 작은 소년의 가슴까지 간질였다. 저도 모르게 애교 섞인 앙탈을 흘린다.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작은 소년의 얼굴위로 고마움이 떠오른다. 작은 소년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큰 소년과 눈을 맞춘다.

 

큰 소년의 눈동자 안에, 작은 소년의 동그란 얼굴이 들이찬다.

아아, 노란 꽃다발 위에 피어난 발그스름한 꽃, 큰 소년은 작은 소년의 머리를 부빈다. 커다란 그의 손가락에 잡힐 듯 말 듯, 사이로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좋다.

 

, 그제야 그들의 명찰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가슴에 달린 새하얀 명찰, 정자로 또박또박 쓰인 큰 소년의 이름은 전원우, 작은 소년의 명찰 색은 조금 다르다. 작은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노란색, 소년의 이름은 이찬, 외자이다. 큰 소년은 작은 소년의 그 외자이름을 유난히 좋아했다. 찬아- 라고 정겹게 부르기도 편하다고, 이름표 위에 새겨진 성과 이름, 단 두 글자 사이의 공백이 예쁘다고, 오얏 리 ()에 빛날 찬 ()자를 쓰는 그 이름의 뜻이, 항상 반짝반짝 빛나는 너와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진다고.

 

이찬은 원우에게 받아든 꽃다발을 품속에 소중히 품었다. 노란 꽃잎이 바람에 일렁이는 것이 보기 좋았다. 찬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코끝에 아른거리는 꽃향기, 저 멀리 지저귀는 새소리, 가슴속에 퍼지는 달콤한 기분, 그리고 무수히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요한 눈동자. 찬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원우의 눈을 마주본다. 다정함, 이 말로도 부족할 그 안의 달콤함. 서로를 서로의 눈에 가득 담는 그들은, 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3월의 아침, 학교는 새내기들을 반겨주느라 분주하다. 앳된 얼굴, 어색한 교복차림의 청춘들과, 자신의 자식들이 한 단계 성숙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님, 지금 이 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함께 흘러가고 있다. 이 날의 풍경은 꽤나 볼 만 하다. 어딜 봐도 새로운 얼굴, 익숙치않은 환경, 그저 주변을 돌아보기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서로 어색해하며 쭈뼛쭈뼛 주변을 서성거리는 학생도 있는가 하면, 친구 손 꼭 잡고 학교 이곳저곳 둘러보기도, 마음 맞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설렘과 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각자 다른 위치, 다른 공간에서 시작하지만, ‘시작이 주는 설렘만은 모든 이들의 표정을 들뜨게 한다.

찬이는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다 준 원우의 손을 놓고,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만이 가진 명랑한 그 목소리에, 원우는 옅게 미소 지었다. 생긋- 찬이도 그에 답변이라도 하듯 웃어 보인다. 그의 환한 미소는 멀리서도 다 보일정도로 빛이 난다고, 원우는 생각했다. 자신이 배정받은 반으로 달려가는 찬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원우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노란 명찰, 너와 참 잘 어울리는 색깔이야. 늘 너만이 가진 맑은 에너지가 꼭 노란빛을 띠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느리게 깜빡이며 살짝 내리깐 시선, 왼쪽 가슴팍엔 자신의 명찰이 보였다. 흰 바탕에 검정 글씨로 쓰인 모양새가 퍽 깔끔하다. 2학년이란 신분을 나타내는 색깔. 원우는 명찰에 쓰인 굴곡을 따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 원우형, 여기서 뭐해?”

 

 

그제야 원우는 숙였던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자신을 부른 학생의 가슴팍에 달려있던 흰 명찰.

 

 

, 아는 동생이 오늘 입학해서.”

 

 

아하, 그럼 이따 교실에서 봐!”

 

 

, 원우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우는, 자신과 같은 반인 친구들 사이에서 형, 혹은 오빠라고 불린다. 나이가 많아보여서, 혹은 아는 것이 많아서 따위의 이유는 아니다. 그냥 동급생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부르라고 해도, 반 친구들은 꿋꿋하게 존칭을 쓴다. 맞다, 그는 복학생이었다.

 

 

 

 

-

 

 

 

재작년이었나, 원우가 잠들지 못한 밤이 하루 있었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날, 그날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정신없이 앓아누웠던 걸로, 하루 종일 이불 속에서 끙끙댔던 걸로 그는 알고 있다. 그렇게 아팠던 정확한 원인도 알지 못했다. 하루, 이틀, 학교를 결석하는 날이 길어지고, 앓아누운 지 딱 나흘째 되던 날, 그의 집엔 누군가가 찾아왔었다. 항상 집에 혼자 살던, 그래서 집에 누군가 들일 일도, 찾아올 일도 없었던 원우는, 자신의 패턴화된 생활을 깨버린 존재, 초인종을 누른 존재에 대한 호기심에 이기지 못해, 아픈 몸을 이끌고 문을 열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있던 작은 소년, 그는 이찬이었다.

 

작은 소년은, 늘 같은 시간에 동네 입구 앞 횡단보도를 지나던 옆집 윗집 사는 형이 4일 동안 보이지 않아 걱정되어 찾아왔다고 했다. 내가 항상 그 시간에 그 곳을 지나간다는걸 네가 어떻게 알아, 라고 물었더니 얼굴색 하나도 변하지 않고 하는 말이, 형한테 관심 있으니까, 였다. 원우는 그 때 패기 넘치던 남중생 이찬의 당당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말을 듣고 벙쪄있던 원우의 손을 이끌고 병원에 데려갔던 건 그 작은 중학생 이찬이었다. 학교를 나가지 못했던 원우를 대신해 휴학 신청을 낸 것도, 원우가 심심해할까 하교 후 매일같이 원우의 집에 찾아왔던 것도, 가끔 무섭다고 베개를 꼭 껴안고 밤에 불쑥 찾아와 원우를 당황하게 했던 것도, 전부.

 

처음에 원우는 이런 작은 소년이 자신의 집에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하교 후엔 늘 비어 있었던, 그래서 자신이 아팠던 그날 공기가 유난히도 차갑던 자신의 집이, 이젠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온기가 채워진다는 게, 원우에겐 마냥 어색한 일이었다. 어색함은 곧 두려움으로 커져갔다. 자신을 언젠간 떠나가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 그것은 원우를 점차 잠식해갔다. 한때는 그 두려움이 극심해져 집 비밀번호를 바꾸고, 집에 없는 척, 울리는 초인종소리도 무시했었다. 그렇게 차갑게 마음의 문을 닫았건만, 꿋꿋이 원우의 틈새를 찾아 파고들었던, 작지만 컸던 동생.

 

 

 

형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찬이가 굳게 닫힌 원우의 집 앞에서 밤을 샜던 날, 차가운 밤공기에 서려 감기 걸렸던 11월 말의 밤, 열로 뜨거워진 찬을 품에 안고 밤새 간호해줬던 새벽 5, 그날 원우는 찬의 진심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원우에게 찬은, 그리고 찬은 원우에게, 그래,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니까.

 

 

 

-

 

 

 

저 거으다와가여

 

 

 

원우는 방금 온 문자의 내용을 보곤 피식 웃어버렸다. 핸드폰 화면 위에 떠다니는 글자 위로, 찬이의 평소 말투가 그대로 배어나온 것만 같았다.

원우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깔려있는 매트위에 드러누웠다. 땀 냄새와 먼지 냄새, 밀폐된 공간 특유의 쾨쾨한 냄새가 공기를 가득 메웠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창고에 떠다는 먼지들을 비추고 있었다. 원우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반대쪽 다리를 그 위에 꼬아 올렸다. 곧 창고 문을 열고 들이닥칠 찬을 생각하니 원우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창문너머 자신의 눈가로 내리쬐는 햇빛이 꽤나 눈이 부시다. 저 멀리서 네가 뛰어오나 보다, 이렇게도 빛이 나는 걸 보면. 원우는 느릿하게 한쪽 팔로 자신의 눈가를 가리고, 눈을 감았다.

 

지금은 동아리시간, 엄연한 수업시간이었다. 그리고 원우와 찬은 매 동아리시간마다 연습을 핑계로 몰래 빠져나와 이곳, 체육 창고 안에서 만나곤 했다. 사실 거짓말을 하고 나오는 건 아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정말 연습도 하니까. , 둘은 모두 교내 공연동아리를 하고 있다. 원우는 힙합을, 찬은 댄스를. 두 동아리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리고 가장 동경 받는 동아리로 꼽힌다. 특히 찬은 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이클잭슨 춤을 특히 잘 추는 1학년이라는, 본인이 참 마음에 들어 하는 수식어를 지니고 있었다.

 

원우는 찬이가 춤추는 것을 참 좋아했다. 찬이야 원래 어렸을 적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잘 추기도 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성숙해지는 고유의 느낌과 춤을 자신만의 느낌으로 재해석, 재창조해 표현하는 실력이 쑥쑥 커가는 것을, 옆에서 함께 보고 자란 원우는 여간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찬이의 무대 중 원우가 가장 좋아했던 무대는, 몇 주 전, 바로 이 곳, 체육 창고 안에서 오직 원우를 위해 췄던 춤. 사실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소 춤 연습을 위해 자주 들었던 빠른 비트의 곡이 아닌, 조금 느린 피아노 선율로 시작했던 곡. 묵직한 반주에 맞춰, 느릿하게 곡선을 그리던 허리, 섬세하게, 모든 동작이 하나로 이어진 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 움직임. 천천히, 그렇지만 밀리지 않던 박자, 표정에서 흘러나오던 여유로움, 그리고 넘쳐흐르는 자신감. 움직일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아름다웠다. 세상 그 어떤 춤보다도 고혹적이던 춤,

 

 

- ’

 

 

, 저 안 늦었죠?”

 

 

요란한 문소리가 남과 동시에 상상 속의 네가 사라졌다. 대신 환한 빛과 함께 눈앞에 네가 나타났다. 땀에 조금 젖은 앞머리가 예쁘다. 숨을 헐떡대느라 빨개진 그 조그만 얼굴도 귀엽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도 빛났다. 안 늦었어, 자세를 고쳐 앉곤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너는 싱긋, 봄바람 같은 미소를 지으며 뽈뽈 걸어와 자리에 풀썩 앉았다. 네가 옆으로 걸어올 때마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너의 체취에 기분이 좋아진다.

 

, 다리 좀. 찬은 익숙하게 원우의 안쪽 허벅지를 몇 번 매만지더니, 그 위로 고개를 뉘였다. 편안함, 둘 사이의 익숙함, 원우도 자신의 여린 안쪽 살에 닿는 찬의 간지러운 머리카락이 주는 기분이 싫지만은 않았다. 자신의 밑에서 피어오르는 찬의 섬유 유연제 냄새, 머리칼 끝에서 풍기는 특유의 샴푸 냄새.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려 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도 여전히 손가락 사이에 잡힐 듯 말 듯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감촉이 좋다. 내린 시선 끝의 찬은 눈매까지 휘어가며 깔깔거린다, 간지럽다고.

 

 

 

 

 

-

 

 

 

고등학생, 그들의 다른 이름은 청춘이다. 뭘 해도 아름다울 나이. 성인과도 비슷한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은 풋풋함과 미숙함이란 망토를 두르고 있는. 그런 그들이 생활하는 학교는, 일종의 작은 사회라고도 하던데. 누군가 그랬다더라- 따위의 이야깃거리는 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작은사회 전반에 퍼지게 되는 곳.

그리고 그 나이 때의 친구들은 가십거리에 열광하기 마련이다. 누구와 누가 사귄다더라, 같은 영양가 없는 이야깃거리마저도 훌륭히 요리되어 사람들의 입속에서 계속 회자되는, 그런 거. 그들에게 찬과 원우는 어떤 하나의 카테고리이자 말머리, 이야깃거리의 주제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이야기를 뜨겁게 만드는 건, ‘그들은 과연 사귀는 사이인가’, 라는 논쟁거리였다.

친한 선후배 관계, 보다도 더 가까운,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둘만의 분위기. 이성간의 분위기였다면 흔히들 ’, 혹은 연애라고 불리는 그것, 허나 동성이란 장막에 가리어져. 깊은 우애, 혹은 형제애라고도 불리는 그런 분위기. 사람들은 저마다 둘 사이의 관계를 정의내리고 판단한다. 허나 이 둘의 관계를 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둘 사이에 주고받는 눈빛, 묘하게 흐르는 기류들을 눈치 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연인보다도 더 연인 같은 선후배 관계라는 수식어,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정말 이 말이 그 둘에게 딱 들어맞는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테다.

 

 

 

-

 

 

19, 성인은 아니지만, 얼추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줄은 파악할 줄 아는 10대의 끝자락. 원우에게 찬이는 그저 나이 어린 동생이 아니었다. 제게 먼저 다가왔을 때는 더없이 맑고 순수한 그냥 꼬맹이였다면, 이젠 항상 제 옆을 든든히 지켜주는, 그런,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어렸을 적부터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인지, 원우에겐 늘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찬 본인보다 원우 자신을 먼저 생각해주는,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에게만큼은 사랑을 베풀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한 찬이가 더욱 소중했고 또 그만큼 그를 아껴주었다. 사실, 원우는 찬을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는 걸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 이 가슴에 퍼지는 간질거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터져 나오는 따뜻포근한 감정, 찬은 이런 자신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걸. 자습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밝은 그의 웃음. 가끔 속이 뭉그러지고 막 이유 없이 우울할 때면 속으로 찬이 그의 웃음을 떠올려본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편안함, 이 포근함이 좋다. 그의 뺨만 보면 입술 맞대고 싶고, 그의 볼을 꼬집어주고 싶고, 그럴 때마다 조금은 원망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표정도 좋다. 언제부터였는지, 원우의 마음 한 가운데에는 항상 찬이가 앉아있었다.

 

 

 

 

-

 

 

 

평소와 같았다면 원우가 찬의 교실 앞에 서서 찬을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었을 터. 종례가 빨리 끝나는 원우와 달리, 찬은 반장이란 역할 덕에 늘 맨 마지막으로 교실 문을 닫아야 했기 때문이다. 찬이 지닌 고유의 밝고 당찬, 노란빛의 색은 학기 초부터 빛이 났나보다. 금세 모두와 잘 어울리고, 선생님께 예쁨을 받는 모습이, 원우는 마냥 보기 좋았다.

시계바늘은 평소보다도 더디게 흘렀다. 오늘따라 종례가 길어진 원우는, 선생님의 종례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가방을 주섬주섬 메고 있었다. 찬이 기다릴텐데, 교탁 앞 선생님의 말씀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걸리적거리는 안경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은 지 오래, 원우는 습관적으로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째깍, 선생님 한 번, 시계 한 번, 초조하게 시선을 자꾸 옮긴다. 초침바늘이 한 칸 자리를 옮길 때마다 원우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선생님은 의미 없는 종례말씀만 반복하신다, 어차피 원우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걸. 이상, 종례 끝,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평소의 느릿한 모습은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재빨리 교실 문을 박차 열어 재낀다. 빨리 찬이 교실로 내려가야 하는데, 찬이 기다리게 하긴 싫은데,

 

 

 

 

 

 

, 문 밖으로 뛰쳐나가던 원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애써 달려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자신보다 두어 뼘 정도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곧은 시선, 이렇게 여기까지 올라와 준건 처음인데, 원우는 자신을 마주하는 그 맑은 눈동자를 깊이 바라본다.

 

 

, 오늘 우리집에서 영화볼래?”

 

 

우물쭈물, 조금 부끄럽게 말하며 꼬물대는 손가락 끝이 귀엽다. 그 모습을 보는 원우의 입가엔 천천히 미소가 번진다. 꼬물거리던 손가락은 이내 원우의 커다란 손에 의해 감싸 쥐어진다. 조금 강한 힘으로, 단단히, . 손에 잡히는 이 선홍빛 따뜻함이 좋다. 원우는 찬의 손을 단단히 잡은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 잠깐만, ! 원우의 손에 붙잡힌 채, 숨가쁘게 뒤를 따라 달려오는 찬. 열어놓은 복도의 창문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일었다. 바람은 살랑거리며 달리는 둘의 앞머리를 휘날린다. 창밖으로 분홍빛 머금은 벚꽃잎도 바람에 흩날린다.

 

 

 

 

-

 

 

 

, , 쫌만 이따 들어오면 안돼요?”

 

 

?”

 

 

“......집 더러운데....”

 

 

비밀번호를 다 입력해 열린 현관문을 붙잡고, 찬이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카락으로 살짝 덮인 귀가 불그스름하다. 그 모습이 꼭 장난감을 빼앗긴 강아지와도 같아서, 원우는 픽 웃음을 흘렸다.

 

 

괜찮아, 같이 치우면 되지

 

 

원우의 큼지막한 손이 찬의 머리를 덮었다. 자신의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머리통.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찬이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찬의 두 볼이 점점 붉어진다.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머리칼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가슴 어디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건지 모를 이 간질거림.

 

찬은 현관문을 홱 열어젖히고선, 집안으로 먼저 쏙 들어가 버렸다. 푹 수그린 고개, 아직 붉게 물들어있던 거 다 봤는데. 서둘러 쫓아 들어간 집안에선 찬 특유의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마치 은은한 향초를 피운 듯, 기분 좋은 느낌에 괜히 간지러워진 코를 비비며, 원우는 찬이의 집을 눈에 담는다.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바로 노란색감의 벽지. 맑은 노란색, 집 안은 꼭 찬이와 같이 밝고 활기찬 에너지로 가득 차있었다.

신발장을 지나 방문 하나, , 그리고 탁 트인 마루, 계속 찬의 걸음을 따라 집 안 깊숙이 걸어 들어가던 원우의 발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아직 안 버렸네,

부엌의 식탁 정 중앙엔 투명한 화병이 놓여있었다. 투명한 유리 속 담긴 물이 찰랑거리며 원우의 얼굴을 비춘다. 노란 빛깔의 꽃이 물에 반사되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 , 아니, 이건, 그니까, 꽃이 예뻐서! 형이 준거....라서는 아니고! 꽃이 향기로워서!”

 

 

..노란 프리지아 꽃, 자신이 찬이 입학식 날 그에게 안겼던 꽃다발이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꽃다발은 아직까지 싱그러운 노란빛을 머금고 있었다.

원우는 가만히, 그 꽃들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시작이 주는 그 싱그러움과 설렘, 그것이 마치 너란 소년이 뿜는 맑은 에너지와도 비슷해서. 그동안 네게 하고 싶었던, 그러나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말, 모두 함축해서 표현하고 싶었던 말, 너의 시작을 응원해. 고등학생으로서의 새로운 시작도, 누구와 하게 될지 모르는 너의 앳된 첫사랑도 말이야. 그리고 그 상대방은, 나였으면 좋겠어.

내가 이런 의미로 네게 이 꽃다발을 건넸다는 걸, 너도 알고 있을까.

 

 

 

, 빨리 와요! 영화 시작해!”

 

 

팡팡, 어느새 마루 넓게 이불을 깔아놓은 찬은 밝게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그러다 갑자기 인 먼지에 놀라 콜록거린다. 그런 모습마저 원우에겐 너무나 귀여웠나, 입가에 웃음을 머금는다. 원우는 찬이 펼쳐준 이불 위로 슬금 올라가, 그의 옆자리에 앉고선 같은 이불을 덮었다. 이불 아래로 자신의 손을 살며시 덮어오는 찬의 손은 따듯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의 두 뺨은 발갛게 상기되어있었다. 어두운 마루 가득, 티브이의 불빛만이 둘을 비추었다.

 

 

 

 

 

영화는 지루했다. 뻔하디 뻔한 엔딩의 러브 스토리. 사실 지금까지의 줄거리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스토리상 줄거리의 절반밖에 오지 않은 것 같은데, 원우는 지루함에 머리를 헝클었다. 사실, 영화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작은 소년 이찬 때문일 것이다. 둘뿐인 집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커텐을 친 어둔 방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지금, 원우의 머릿속엔 이미 다른 영화 한 편이 돌아가고 있었다. 대체 어떤 전개를 그려가고 있는 진 몰라도, 원우는 종종 얼굴이 달아올랐다가, 찬의 작은 움직임에도 움찔거리곤 했다.

 

원우가 정신을 차린 건,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이 짙게 키스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였다. 조금 야한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귀를 간질였다. 입맞춤이 그리는 화면보다는, 그들의 가쁜 숨소리가 더 야하게 느껴졌던 장면.

원우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이리저리 굴러가는 시선. 찬이 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랑 단둘이 이런 영화를 보자 한 거야, 얘 영화는 잘 보고 있나.

스르륵 눈을 돌려 찬이가 있을 왼편을 바라보았다. 두 다리 끌어안은 채 들뜬 숨을 내쉬던 찬. 부끄러운 듯 붉어진 그의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눈빛만은 화면을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자꾸만 혀로 입술을 축였다. 살짝 벌어져있던 입술. 그 붉은 살점은 희고 고운 찬의 얼굴과 대조를 이룬다. 티브이 불빛에 반사된 그의 입술이 더욱 빛났다. 부드러울 것 같아.

 

 

 

본능이었나, 원우는 찬이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동시에 그의 뒷목을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찬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자신의 입술 위로 닿는 그 따듯하고 몰캉한 느낌, 생각보다 훨씬 달고, 훨씬 부드럽다. 원우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찬은 눈을 크게 떠보였다. 당혹감에 요동치던 시선,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는 원우와 시선을 마주하자, 질끈, 두 눈을 꾹 감아버린다. 찬이의 몸이 크게 움츠려드는 게 느껴졌다.

 

 

 

퍼뜩, 원우는 정신을 차린다. 지극히 본능적이고도 동물적이었던, 다소 억지스러웠던 입맞춤. 찬이가 싫어했으면 어쩌지, 더 이상 날 만나주지 않으려하면 어쩌지, 이렇게 관계를 끝내고 싶진 않은데, 정말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원우는, 조심스레 입술을 떼어내곤 물었다.

 

 

 

“...싫어?”

 

 

 

부끄럽게, 으응, 소리를 내며 붉어진 고개를 가로젓는다.

 

 

, 다행이야. 그제야 원우는 안심의 웃음을 보이더니 다시 입을 맞춰온다. 두 입술이 맞닿은 자리가 화끈거린다. 이번엔 적극적으로 두 팔을 뻗어 원우의 목을 감싸 안는 찬. 원우의 목 뒤로 스치는,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손바닥.

 

원우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찬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찬은 자신의 속살로 와닿는 차가운 공기에 몸을 움츠린다. 원우는 검지를 곧게 뻗어, 찬의 가슴팍을 흩어 내렸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곱고도 부드러운 그의 살결,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열기, 작은 떨림.

 

 

흐응....”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야살스런 신음을 흘린다. 도발하는 건가 싶어 그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움찔 거리면서도, 가만히 눈을 감고 짙은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미묘한 간지러움에 손가락만 꼬물댄다.

 

원우의 손가락은 찬의 판판한 가슴팍을 지나, 톡 튀어나온 붉은 방울을 건드렸다. 아흣, 생소한 자극에 찬은 폭 몸을 움츠린다. 밀착된 서로의 몸은 뜨겁게 열로 달아올랐다. 어느새 원우의 가슴께는 찬과 맞닿아 있었다. 이 상황이 꽤나 부끄러운 듯, 찬은 주변의 이불을 아무렇게나 움켜쥐곤 이불 속으로 쏙, 자신을 숨긴다. 발개진 그 손끝이 또 귀여워, 원우는 낮은 웃음을 내며 이불을 젖히곤 그 안을 파고들었다.

따듯해.

어둔 공기 속 누군가의 붉은 입술이 오물거리면, 서로의 뜨거운 숨결로 덮어버린다. 그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불만 간간히 들썩일 뿐, 간헐적으로 더운 숨을 내쉬는 소리만 들려왔다.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억눌렸던 신음이 터지는 소리, 거칠게 목을 긁고 올라오는 신음소리.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더운 공기를 가르고 이불이 걷힌다. 붉어진 서로의 얼굴엔 더운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둘은 가만히 서로의 눈 속에 서로를 담으며 색색- 조금 가빠진 숨을 고른다.

 

영화는 어느덧 끝이 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

 

 

 

 

이찬, 너 왜 요새 원우형이랑 안다녀? 싸웠어?”

 

 

무슨 일 있었, 아니 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ㅋㅋㅋㅋㅋ

 

 

하루 종일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분이랄까. 자신의 입술위로 닿던 따뜻한 그의 숨결, 티셔츠 사이로 들어왔던 길게 뻗은 그의 손가락, 생소했던 고통과 쾌락, 서로가 서로의 본능에만 충실했던 그 날 밤.

생각만 해도 몸이 달뜨는 기분이었다.

 

 

 

찬아, 집에 가자

 

 

그래, 지금 눈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원우 형 얼굴만 봐도 말이야.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면 보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 두 동공이 서로를 담을 때. 찬은 그 속에서 그날의 자신과 원우를 발견한다. 차마 다시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찾아오는 민망함. 찬은 더 이상 원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원우의 눈동자 속에서 저를 지워낸다.

 

 

 

오늘 나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 먼저 가

 

조금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원우, 찬은 그의 시선을 회피하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저를 집요하게 따라오던 그 시선을 애써 떨쳐냈다. 그날부터였을 거다, 찬은 원우만 보면 뜨거워지는 얼굴에, 의도치 않게 원우를 피하게 되었던 게. 찬은 더 이상 원우를 만나려하지도, 만나주지도 않았고, 그 하루하루가 모여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공백을 키워만 갔다.

 

 

 

 

 

-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면 흘렀을 터. 오늘도 어김없이 찬은 홀로 하교한다. 더 이상 자신의 발걸음을 맞춰 걸어주는 상대가 없다는 게, 같이 이어폰을 나눠 낄 상대가 없다는 게, 이젠 이 외로움도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느껴지는 이 허전함, 혹은 공허함.

 

여느 때처럼, 아파트 공동현관문을 열어젖힌 찬이의 발걸음이 문득 굳었다. 조금 상투적인 표현으론, 발바닥이 땅에 붙었다고 해야 하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서 우물쭈물 댄다. 열려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 살짝 굳어있던 원우의 얼굴이 비쳤다.

 

 

찬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왔다. 그는 가끔씩 어떤 순간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원우의 얼굴을, 항상 자신을 바라봐주는 깊은 눈동자를, 자신이 종종 베고 누웠던 그 튼튼한 허벅지를 그렸던 찬이었지만, 아직 원우를 직접 마주하는 것은 부담스럽나보다.

 

허공에서 몇 초간 부딪히던 시선, 찬은 시선을 돌려 계단 쪽으로 향한다.

 

 

 

타고 가

 

 

멈칫,

 

 

그러나 이내 찬은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밟아 선다. 어쩐지 그의 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원우만 홀로 담고 있는 엘리베이터 문은 속절없이 닫힌다. 위잉, 부드러운 기계음 소리와 함께 이층, 삼층, 높이 올라간다. 문에 작게 난 창 너머로 찬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종종, 빠른 걸음으로 자꾸 사라져버리려고만 하는 찬, 언뜻 보이는 그의 얼굴이 붉다. 하지만 이내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그를 지나쳐버리자, 원우는 한숨을 내쉰다. 오랜만에 얼굴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자신의 눈에 잠시나마 맺혔던 찬의 흔적을 좇는다.

 

 

찬이 자신의 층에 도착했을 땐, 이미 원우가 자기 집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눈매가 오늘따라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자신을 꿰뚫는 듯한 그의 시선. 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린다. 자신의 고개를 따라 내려오는 원우의 진득한 시선이 느껴진다.

 

 

 

 

왜 날 피하는 건데?”

 

 

“...........”

 

 

“.....그날, 혹시 싫었던 거야?”

 

 

 

달아오른다, 갑자기, . 그날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때보다 조금- 덜 붉어진 찬의 얼굴. 여전히 무거운 고개는 들지 못한 채, 원우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다. 둘 곳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다 보이는데.

 

 

싫었던 거...아냐

 

 

 

작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끄럽게 대답하곤, 순식간에 집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그의 어깨를 잡을 틈도 없이, 원우는 허공에 들린 제 팔을 무안하게 내렸다. 아파트 복도엔 찬의 집 도어락이 남긴 빛만이 껌뻑였다.

 

 

 

 

 

-

 

 

 

 

고삼, 한국에선 뭐든 다 통하는 나이라고 하던데. 그 시기 만큼은 타인에 의해서라도 공부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시기라고. 원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학년 꿇어 학교에 다닌 만큼, 원우의 마음은 공부에 대한 열의로 가득했다.

그의 가슴엔 여전히 찬이가 앉아있었다. 하지만 원우에겐 더 이상 그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연락이 단절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찬이는 계속 원우를 피하고, 원우는 어느덧 수험생이 되었고, 둘 사이엔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니.

 

 

 

 

-

 

 

 

그렇게 달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었다. 현 고삼 학생들에게 마지막 한 해가 가장 빠르게 지나간다고 하던가. 눈 깜짝하면 한 달이 돌아 모의고사를 봐야하고, 모의고사 몇 번만 보면 어느덧 수능이 닥치고, 그 후 정신없이 여유를 만끽하다보면,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고등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 성인으로서 사회로 나아갈 마지막 준비를 마치게 된다.

 

 

 

그날도 원우는 가만히 책상에 앉아있었다. 교실 앞과 옆, 그리고 교실 바깥까지 가득. 친구들, 정확히는 한 살 어린 학급 동료들의 부모님으로 꽉 차 있었다. 그들 품엔 각자의 꽃다발이 들려있다. 분홍, 노랑, 빨강, 원색의 진한 색감이 공간을 채운다. 이리저리 공기 중으로 뒤섞이는 꽃향기가 어지럽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원우는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는다. 계속 가만히 앉아있을 바엔 집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내게 꽃다발을 건네줄 만한 사람은 없는걸. 3년 조금 넘는 시간동안 정들었던 교실, 원우는 그간의 추억을 한 번 돌아보며 눈에 담는다. 이 와중에 찬이와 함께 한 짧지 않은 추억의 조각들이 눈앞을 스친다. 마치, 내 옆에 그가 정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원우는 쓴 미소를 삼키며 짐을 챙겼다. 짐이래봤자 졸업앨범과 학교에서 나눠준 한 송이의 장미꽃이 전부. 이제 다신 이 교실을, 이 책상을, 이 의자를 사용하지 못하겠지. 처음, 그때의 설렘을 아직 잊지 못하는데, 마지막이 주는 이 감정은 퍽 쓸쓸하고 씁쓸하다. 원우는 품 안의 짐을 꼭 안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순간이었다,

오른편에서 익숙한 향기가 코를 간질인 건.

 

 

 

“......

 

 

본능적으로 돌린 고개, 그 곳에는 익숙한 향기가,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인영이 있었다. 설마.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1년 동안 참 많이 보고 싶었던, 그러나 야속하게도 단 한 번도 날 만나주지 않았던, 날 애태웠던, 내 마음 속 정중앙에 자리 잡은 사람.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가 놓고, 가끔씩 무언가 그리워 하는듯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봤던 사람.

황급히 안경을 찾아 주머니를 더듬었다. 코끝에 서툴게 걸치곤, 다시 바라보았다. 여전히 너의 향이 나는 그 곳을.

 

 

 

...이 찬, 그 곳에는 정말로 네가 있었다. 품 안에 노란 꽃다발을 안은 채. 익숙한 꽃, 익숙한 포장지. 처음 보는 꽃이 아니었다. 내게 네게 입학식 날 안겼던, 바로 그 꽃다발, 노란 프리지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실한 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사실 네가 와줄 것이란 기대도 안했었다. 지나가다 인사라도 해주면 다행이지. 원우는 늘 그랬다시피, 습관적으로 찬의 눈동자를 곧게 바라보았다.

항상 반짝이던 찬의 두 검은 눈동자가, 오늘은 눈가에 맺힌 눈물로 반짝였다.

 

 

 

당신의 시작을...응원합니다....”

 

 

 

창문이 열려 있던 것도 아닌데, 노란 꽃잎이 아롱아롱 흩날렸다.

 

 

 

 

 

-

 

 

 

E.

 

 

“....찬아....일어나...... 학교 가야지...”

 

 

우응, 조금만...”

 

 

“......그래...”

 

 

따스한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든다. 나른한 방안 침대위엔 아직 잠에 취한 두 소년이 아무렇게나 누워있었다. 5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모닝콜이 방안을 가득 채웠지만, 침대 맡을 더듬거리는 원우의 손길에 의해 다시 한 번 꺼지고 만다.

 

다시 벚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왔다. 원우는 대학생으로, 찬은 노란 명찰의 3학년으로, 새로운 시작을 마주한다. 둘을 이제 한 집에 동거하는 사이가 되었다. 크지 않은 집이였지만, 둘이라서 만족스러운, 단 둘이 꾸려나가는 집. 집안 구석구석은 둘만의 추억이 담긴 가구 혹은 소품으로 들어차 있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넓지 않은 마루의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흰 프레임의 커다란 액자 하나.

그 안에 있던, 작년 이맘때의 바로 그 포장지와 함께, 정성스레 표구되어 있는 노란 프리지아 꽃잎들.

 

그리고 그 아래, 다소 삐뚤빼뚤한 글씨가 작게 적혀있었다.

 

 

 

우리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2016년의 찬이가, 2017년의 찬이에게

 

 

 

 

 


-

 


http://17boysfactory.tistory.com/20

 

17소년 공작소 합작 키워드인 '꽃말' 중 '노란 프리지아' 란 꽃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노란 프리지아가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란 의미를 가져 졸업식, 혹은 입학식 날 자주 사용되는 꽃이란 이야기를 듣고 한 번쯤은 서로에게 시작을 축복하는 의미로 저 꽃을 주고받는 원차니들이 보고싶어서 시작한 글....

생각보다 많이 길어져서 당황스럽지만8ㅅ8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제 뒤로 공개될 다른 작품들도 많이 봐주세요^0^